2024년 5학년 농적삶 8일차(10월 21일)

작성자
김 학민
작성일
2024-10-21 23:30
조회
19
다시 아침 6시 기상

월요일이 왔다. 다시 6시 기상이다. 더 정확히는 6시 20분. 이번 숙소는 협업농장 바로 옆이라서 여유가 좀 더 생겼다. 아침식사들을 하고 워케이션 사무실로 이동했다. 아침마다 모여서 브리핑 겸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인사도 하고 차도 한 잔 하면서 그 날 해야 할 작업이 뭔지 확인도 하는 시간이다.

오늘 해야 할 작업은 오전에는 (지난 주에 해봤던) 수선화 뿌리 캐기. 그물코 농장에서 진행한다. 오후에는 라라라 채소밭에서 쪽파 심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저녁에는 <마을의 이해>라는 수업도 있었는데 아마도 오전부터 쭉 일을 하다가 저녁 수업까지 마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로에 대해

이렇게 중요하면서도 막연한 주제가 또 있을까 싶다. 각자의 생각과 상황들이 다른 만큼 답도 다양하다. 고등학생 때 진로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개는 직업과 연관된다. 나는 과거 학적부 장래희망란에 '선생님'이라고 썼었다.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초등학교(국민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나에게 선생님이 되라고 권하거나 강요하신 게 아니다. 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봤을 뿐이다. 학생들을 잘 대해 주셨고 생각해 주신다는 게 어린 눈에도 보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큰 결정인데 결정의 순간이 거대하고 극적이지는 않았다.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하고 희미했다. 그냥 그게 좋았다는 게 다니까.

5년 동안 장래희망란에 쓴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바뀌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수능 준비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범대를 갈까. 교대를 갈까.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 시절 내 생각은 단순했다.

1단계: 수능을 (사범대 커트라인 넘어갈 정도로) 잘 본다.

2단계: 사범대에 입학한다.

3단계: 임용고사를 본다.

4단계: 선생님이 된다.

1단계부터 망쳤다. 사범대는 워낙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만만하지 않았다. 사실 평소 모의고사보다 수능 점수가 더 잘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 난이도가 (평소보다) 좀 낮았던 것이다. 시험을 평소보다 잘 본 모두들 기분은 좋았으나 상대평가였던 만큼 사실 점수의 지형도가 크게 바뀐 건 아니었다. '자부심, 성취감의 인플레이션'이라고 할까.

1단계에서 실패했으니 2단계도 당연히 안 된다. 수시로 사범대 국어교육과 한 곳에 지원을 하기는 했으나 불합격. 나는 당시 면접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다. 당시 내가 받은 질문은 이렇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데(IMF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끄럽지만 당시 내가 했던 대답은 이렇다.

"국산품 애용이요."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사실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답변이 틀렸다기보다 그게 왜 좋지 않은 경제 상황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연결 고리가 되는 지식이 없었다. 어떤 대답이든지 간에 그 대답을 한 이유나 근거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그 당시 불합격했다는 것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지만 그 때 질문과 답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곱씹게 됐다. 나는 시험만을 준비했을 뿐 내 생각을 키우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사고하는 힘이 없었다.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따져보고 이해하는 힘이 없었다.

정시로는 사범대에 지원할 수 없어서 플랜B를 세웠다. 내 점수에 맞는 학과에 지원을 한 후에 사범대로 전과를 하자. 혹은 교직이수가 가능하다면 그걸 하자. 전과의 기회는 2학년 때. 열심히 해봐야지, 라고 생각한 나의 1학년 1학기 평점 2.3점. 고삐가 풀린 망아지였다. 공부라면 지긋지긋했고 공부 외의 모든 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1학기 평점을 보고 충격을 받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2학기 때 열심히 해야지. 2학기 평점 2.0점. 학사경고 직전까지 갔고 이 성적 때문에 2학년 때 기숙사는 못 들어가게 됐다. 전과도 교직이수도 물거품이 됐다. 방황의 나날이었다. 10대 후반 별 생각 없이, 고민 없이 시험 준비에만 몰두했으니 사실 (시험이라는 틀에 갇힌) 빈수레였던 셈이었다. 그걸 그 당시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내가 생각한 단계대로 안 된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나는 교사가 되는 방법만 알았을 뿐 어떤 교사가 될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은지, 내가 롤모델로 삼고 싶은 선생님은 누구인지... 이런 생각은 전혀 없이 그저 시험 준비에만 매달린 것이다. 모의고사 점수에 울고 웃으면서. 잘 되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공부가 지긋하지만 나를 끌어줄 그 생각 하나. 훗날 어떤 선생님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그 생각 하나.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 하나.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과 막연함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저 끝에서 불빛이 되어 나를 인도해 줄 그 생각 하나. 그게 없었다. 그 결과 나는 2.0점을 받고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현재 학생들은 홍동에 내려와서 밭 일을 하고 있다. 농적삶이라는 과정. 여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진로 수업'의 한 가지다. 진로와 농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농사도 진로의 하나로 생각해 보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라면 '진로'를 '직업'으로 너무나 좁게 본 것이다.

농사는 모든 인간의 근간이다. 먹어야 사니까.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그런데 도시에 사는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마트, 편의점만 가도 먹을 것은 넘쳐난다. 음식을 가공하고, 포장하고, 유통하고, 판매하는 다른 역할도 중요하다. 그런데 먹을 게 없으면 이것도 다 소용이 없다. 우리가 먹을 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땅에서 난다.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나는지 온몸으로 배우는 것. 도시에 살면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면서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는지 아는 것. 이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 하나가 아닌 거대한 '우리'를 눈치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좁은 시야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 그저 내가 시험 준비와 내 입장에만 몰두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것처럼 좁은 시야가 아니라. 이런 삶도 있고, 이런 생활도 있고,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렇게 알게 된 것들이 조각조각 뭉치고 단단해지면 그게 또 자신의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이 곳 홍동마을은, 젊은협업농장은 그저 농사를 짓는 데 몰두하지 않는다. 느슨한 연대가 여태껏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다녀온 도서관도 만화방도 빵집도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같이 참석하는 평민마을학교 수업들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같이 살아가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같이 사는 곳을 만들고 같이 생각하고 고민하자는 뜻이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여기 온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바란다. 학생들이 하는 고민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시험 준비는 잘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벌어야 할까. 여기에 하나 더 붙여서 고민을 해보기를 바란다. 같이 사는 (거대한) 우리 안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진로 찾기를 '자신에게 맞는 직업'에 대한 생각으로 시야가 좁아지는 순간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알기를 바란다. 진로 찾기는 자신 안의 벽을 허물고 세상에 대해 받아들이고 배우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것에 가깝다.

나도 우물 밖으로 나온 지는 사실 얼마 안 됐다. 나보다 더 빨리들 나갈 수 있기를. (물론 나와 보니 더 큰 우물이 또 있기는 한데...)

전체 1

  • 2024-10-22 19:36

    선생님의 어릴때 장래희망 이야기를 호기심을 가지고 쏙 빠져 읽었네요~ ㅎㅎ 재밌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아이들의 경험이 거대한 우리를 눈치챌수 있는 기회가 되길~